스기우라 다다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기우라 다다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58년부터 1970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에서 언더핸드 투수로 활약했다. 1959년에는 38승 4패, 평균자책점 1.40을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일본 시리즈에서 4연투 4연승을 거두며 MVP를 차지했다. 그는 1958년 신인왕, 1959년 다승왕,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고 승률,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고, 1959년에는 투수 부문 5관왕을 달성했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난카이 호크스 투수 코치를, 1974년부터 1977년까지 긴테쓰 버펄로스 투수 코치를 역임했으며,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난카이 호크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을 맡았다. 은퇴 후에는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2001년 급성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스터스 리그 최우수 투수에게 '스기우라상'이 수여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이치현 출신 야구 선수 - 와다 쓰요시
와다 쓰요시는 2024년 은퇴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로, NPB와 MLB에서 투수로 활동하며 신인왕, 다승왕, MVP 등을 수상하고 국제대회에서도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도 자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아이치현 출신 야구 선수 - 가네다 마사이치
가네다 마사이치는 1950년부터 1969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며 통산 400승을 기록하고, 롯데 오리온스 감독을 역임하며 1974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일본 프로 야구의 전설적인 투수이다. - 난카이 호크스 선수 - 후쿠시 히로아키
후쿠시 히로아키는 일본 프로 야구와 KBO 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80년 일본 최고 승률, 1983년 KBO 리그 30승 및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나, 은퇴 후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되는 불운을 겪은 일본 돗토리현 출신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 난카이 호크스 선수 - 고바 다케시
고바 다케시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 감독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시절 팀을 리그 우승 4회, 일본 시리즈 우승 3회로 이끌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장이다. - 릿쿄 대학 동문 -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는 1955년 효고현 고베시 출생의 일본 영화 감독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칸 영화제 등에서 수상했고, 2023년에는 가자지구 휴전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 - 릿쿄 대학 동문 - 김상용 (시인)
김상용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망향의 정서와 시대적 고뇌를 표현한 시집 『망향』과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소설집 『무궁화』를 발표한 시인이다.
스기우라 다다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스기우라 다다시 (杉浦 忠) |
출생일 | 1935년 9월 17일 |
출생지 | 아이치현 도요타시 |
사망일 | 2001년 11월 11일 (향년 66세) |
사망지 | 오사카 |
신장 | 176cm |
체중 | 71kg |
포지션 | 투수 / 코치 / 감독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아이치현립 거모고등학교 |
대학교 | 릿쿄 대학 |
프로 입단 연도 | 1958년 |
프로 데뷔 | NPB / 1958년 4월 5일, 난카이 호크스 |
마지막 경기 | NPB / 1970년 10월 10일, 난카이 호크스 |
선수 | 난카이 호크스 (1958년–1970년) |
지도자 경력 | |
코치 | 난카이 호크스 (1966년–1967년), 긴테쓰 버펄로스 (1974년–1977년) |
감독 | 난카이 호크스 / 다이에 호크스 (1986년–1989년) |
통산 기록 | |
승-패 | 187승 106패 |
평균자책점 | 2.39 |
탈삼진 | 1756 |
감독 성적 | 223승 271패 26무 |
승률 | .451 |
수상 | |
신인왕 | 퍼시픽 리그 신인왕 (1958년) |
MVP | 퍼시픽 리그 MVP (1959년) |
트리플 크라운 | 일본 트리플 크라운 (1959년) |
일본 시리즈 MVP | 일본 시리즈 MVP (1959년) |
20승 이상 시즌 | 5회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1964년) |
30승 이상 시즌 | 2회 (1959년, 1960년) |
명예의 전당 | |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95년) |
2. 프로 입단 전
스기우라는 아이치현 도요타시(구 아게모)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릿쿄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야구 선수로서의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스기우라는 안경 때문에 대학 2학년 때 투구 폼을 사이드암으로 바꿨다.
도쿄 육대학 야구 연맹에서 스기우라가 속한 릿쿄 대학은 1957년 춘계 리그와 추계 리그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으며, 특히 와세다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2. 1. 유년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아이치현 도요타시 (구 아게모)에서 태어났다. 아이치 현립 고로모 고등학교(현재의 아이치 현립 도요타니시 고등학교)를 거쳐 릿쿄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무명의 강속구 투수였으나,[74] 대학 진학 후 나가시마 시게오, 모토야시키 긴고와 함께 ‘'''릿쿄 3인방'''’으로 불렸다.
1학년 봄부터 마운드에 올랐으며,[74] 원래는 오버스로 투수였으나 대학 2학년 때 어깨 부상으로 사이드암(언더스로라는 이야기도 있다)으로 전향했다.[74] 스기우라 본인은 전향 이유를 '안경'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안경은 무거워서 오버스로 투구 시 폼이 흔들렸기 때문에, 머리 위치를 일정하게 하기 위해 사이드암으로 바꿨다고 한다.[3][61]
투구 폼 변경 후 2년 동안 28승을 거두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57년 춘·추계 리그 연패에 기여했고,[74] 가을 와세다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통산 36승(릿쿄 OB 중 최다) 12패, 평균 자책점 1.19, 233탈삼진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두 차례 선정됐다.
대학 2학년 때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을 시도했으나, 구단 대표가 "어쨌든 졸업하고 오라"며 거절한 일화가 있다.[12]
2. 2. 투구 폼 변경과 대학 시절 활약
릿쿄 대학에 진학한 스기우라는 동기인 나가시마 시게오, 모토야시키 긴고와 함께 ‘’’’릿쿄 3인방’’’’이라고 불렸다. 고교 시절에는 무명의 강속구 투수였으나,[74] 대학 1학년 봄부터 마운드에 올랐다.[74] 원래는 오버스로 투수였지만, 대학 2학년 때 어깨 부상으로 사이드암(언더스로라는 이야기도 있다)으로 전향했다.[74] 스기우라 본인은 전향 이유를 '안경'이라고 설명했는데, 당시 안경은 무거워서 오버스로 투구 시 폼이 상하로 심하게 움직여 제구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61]이러한 투구 폼 변경은 스기우라의 공에 독특한 회전과 구위를 주었다. 팔꿈치가 먼저 나오는 오버스로 시절의 폼과 천성적인 관절의 부드러움이 사이드암 투구 폼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위력적인 직구를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손목을 세워서 언더스로’라고 말했던 폼은 당시 시즌 30승을 거두었던 요미우리의 오토모 다쿠미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통산 36승(릿쿄 OB 중 최다) 12패, 평균자책점 1.19, 233탈삼진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두 차례 선정됐다. 특히 폼 변경 이후 2년 동안 28승을 거두며 활약했다.
1957년 춘·추계 리그 연패에 기여했고,[74] 가을에 열렸던 와세다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모리 도루, 기쓰기 후미오 등이 포진한 강력 타선을 누르고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같은 해에 열린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결승전 상대이자 오키쓰 다쓰오 등이 소속된 센슈 대학을 누르고 팀 우승을 이끌었다.
2. 3.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 시도
1955년경, 스기우라는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야구부 합숙소를 빠져나와 아이치현에 본거지를 둔 주니치 드래건스의 구단 사무소를 방문했다.[12] 이들은 "군대 같은 릿쿄 야구부가 싫어졌으니, 대학을 중퇴하고 주니치에서 야구를 하고 돈을 벌고 싶다. 계약금은 필요 없다"라고 제안했으나,[12] 주니치 구단 대표는 이를 거절했다.[12]
쓰보우치 미치노리(주니치 OB, 스기우라의 릿쿄 대학 선배)는 자서전에서 스기우라가 주니치에 입단하려 했던 이유를 "고향 구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추측했다.[12] 전 주니치 구단 대표 다카다 가즈오(재임 기간: 1961년 - 1964년)는 "스기우라는 '아이치현 출신이니까 주니치 팬이다'라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스기우라는 후에 쓰보우치로부터 진위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런 일이 있었네요"라고 답했고,[12] 나가시마도 곤도 유이시로부터 이 건에 대한 질문을 받고 동요를 보였다.
쓰보우치는 저서에서 1955년 9월, 스기우라와 나가시마가 니시긴자의 주니치 구단 사무소를 방문해 나카무라 산고로 구단 대표에게 입단을 제안했지만, 타이르고 돌려보냈다고 밝혔다.[12]
곤도 유이시는 자서전에서 다카다 가즈오(당시 구단 대표 대행)의 증언을 인용, '두 사람은 2학년 말경, 나고야의 주니치 본사에 갑자기 찾아와서 입단을 제안했다. 하지만 구단 대표 대행을 맡고 있던 자신이 '어쨌든 졸업하고 오라. 대학생은 공부가 본분이니까'라고 설교했다'라고 전했다.
스기이 테루오는 나가시마와 친분이 있던 쓰루타 고지의 자서전을 인용, "(만약 두 사람의 주니치 입단이 실현되었다면, 스기우라가 입단한) 난카이의 미도스지 퍼레이드(우승 퍼레이드)는 나고야의 고로코지 (우승) 퍼레이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가시마가 입단한) 요미우리의 V9은 주니치의 V9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주니치는 아까운 인재를 놓쳤다"라고 언급했다.[12]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일본 맥주나 아사히 신문사 입사를 고려했으나,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대학 선배 오사와 마사요시를 통해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상당한 영양비를 받았는데, 나가시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스기우라는 난카이로 입단하여 대조를 이루었다.[13]
입단 첫 해, 신인임에도 개막 투수로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 등판하여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14] 밑에서 솟아오르는 직구와 크게 휘는 커브를 활용하여[9] 그 해 27승을 기록, 신인왕을 수상했다.[9]
1959년에는 38승 4패(승률 .905)라는 경이로운 성적으로[15] 리그 우승에 기여, MVP를 만장일치로 획득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4연투 4연승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68] 54⅔이닝 연속 무실점 퍼시픽 리그 기록과[16]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5번째이자 리그 분리 후 2번째로 투수 5관왕을 달성했다.[16]
1960년에도 31승을 거두며 2년 연속 30승 이상을 기록했다. 1961년 5월에는 통산 100승을 달성, 프로 입단 3년 1개월, 188경기 만의 최단 기록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오른팔 혈행 장애(동맥 폐색)로 수술을 받고 시즌을 마감했다.[17]
1962년 복귀 후 1963년까지 각각 14승에 그쳤으나, 1964년 20승을 기록했다. 1965년에는 "3이닝 이상 투구 불가" 진단을 받고 구원 투수로 전향했다.[18] 이후 싱커를 익혔으나, 장점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51][50]
1965년 시즌 후 은퇴를 결심했으나, 1966년부터 난카이 1군 투수 코치를 맡으며 투수진 부족으로 코치 겸 선수로 복귀했다.[19] 1969년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한 노무라 가쓰야의 설득으로 현역을 연장했고, 1970년 시즌 후 은퇴했다.[24]
1971년 3월 25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자이언츠와의 오픈전에서 은퇴 경기를 가졌고,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대결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25]
통산 187승을 기록, 명구회 가입 기준(200승)에는 미달했지만,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뛰어난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 그의 투구 폼은 "손목을 세운 언더스로"로 불렸으며, 독특한 손목 사용과 유연한 고관절을 활용한 강속구가 특징이었다.[3]
3. 1. 난카이 호크스 입단과 신인왕
릿쿄 대학을 졸업하고 1958年|1958년일본어에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난카이에서 릿쿄 대학의 선배였던 오사와 마사요시(오사와 게이지)로부터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적지 않은 금액의 영양비를 받았으나, 난카이 감독 쓰루오카(야마모토) 가즈토에게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십니까?"라며 날카롭게 거절했다. 이후 번복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나가시마와 대비되어 의리를 지키며 난카이에 입단한 스기우라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13]입단 후 신인이면서도 개막 투수를 맡아 도에이 플라이어스를 상대로 프로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14] 밑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직구와 옆으로 크게 휘어지는 커브로 프로 타자들을 상대하며[9] 입단 첫 해에 27승을 거둬 신인왕을 차지했다. 쓰루오카 감독으로부터 "이제야 세이부를 두드릴 수 있게 됐다"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9]
2년 차인 1959年|1959년일본어에는 '''38승 4패(승률 .905)'''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난카이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고, MVP를 만장일치로 수상하였다.[15]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1차전부터 4차전까지 모두 등판해 4연투, 4연승으로 맹활약하여 난카이의 첫 일본 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이 때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스기우라는 "혼자가 되면 기쁨이 북받쳐 오르겠죠"라고 말하려던 것을 "혼자가 되어 울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68] 같은 해에 기록한 54와 2/3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은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16]
동료였던 다쿠와 모토지는 스기우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3. 2. 1959년, 전설적인 시즌
릿쿄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에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한 스기우라는 2년차인 1959년에 '''38승 4패(승률 9할 5리)'''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했다.[15] 24선발승으로 1955년 오토모 다쿠미(26선발승)에 이어 역대 잠수함 최다 선발승 2위에 랭크되었지만 1968년 같은 팀 미나가와 무쓰오가 26선발승으로 타이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압도적인 성적으로 난카이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다(투수 부문 5관왕).[74] 같은 해에 54와 2/3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은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74]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1차전부터 4차전까지 모두 등판해 4연투, 4연승으로 맹활약하며 난카이의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이때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스기우라는 “혼자가 되면 기쁨이 북받쳐 오르겠죠”라고 말하려던 것을 “혼자가 되어 울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그의 자서전인 《내가 사랑했던 야구》에서 밝혔다. 한편, 1959년 24선발승으로 역대 퍼시픽리그 정규시즌 MVP 최다 선발승 기록을 세웠지만 2013년 다나카 마사히로에 의해[76] 타이가 됐다.
동료였던 다쿠와 모토지는 스기우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3. 3. 혈행 장애와 투구 스타일 변화
스기우라 다다시는 1961년 9월 초순 20승을 달성했으나, 오른손 저림 증상을 호소했다. 오사카 대학 병원에서 검진 결과, 연투로 인한 오른팔 혈행 장애(동맥 폐색)가 확인되어 도쿄대 병원에서 허벅지 혈관 이식 수술을 받았다.[17] 이로 인해 시즌 폐막까지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1962년 복귀했지만, 1963년까지 각각 14승에 그쳤다. 부상 후 악력이 크게 떨어져 투구 수가 50개를 넘으면 팔이 뻣뻣해졌다.[68][52]1964년에는 증상이 다소 완화되어 20승을 거두었으나, 1965년 5월 하순부터 증상이 악화되어 의사로부터 "3이닝 이상 투구 불가" 진단을 받았다. 이에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은 6월부터 스기우라를 구원 투수로 전담 기용했다.[18] 스기우라는 "제가 퍼시픽리그 구원 투수의 원조인 셈이죠. 구원 성공률이 높았고, 앞선 투수가 내보낸 주자를 돌려보낸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세이브 제도가 있었다면 꽤 기록을 세웠을 겁니다"라고 회고했다.[11]
이후 스기우라는 땅볼을 유도하는 싱커를 익혔으나, 이는 오히려 장점을 잃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혹사로 투구 수를 줄이고 싶었던 스기우라는 동갑내기 투수 미나가와 무쓰오의 싱커를 배우려 했다. 노무라 가쓰야는 사이드 스로 투수가 싱커를 던지면 직구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반대했지만, 스기우라는 싱커를 익혔다.[51][50] 노무라 가쓰야는 "만약 그때 스기우라가 가라앉는 공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승수는 더 늘었을 것이다"라며 후회했다.[51]
스기우라의 투구 폼은 '손목을 세운 언더스로'라는 독특한 손목 사용이 특징이었다. 오버스로를 옆으로 눕힌 형태로, 팔은 어깨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공에 독특한 회전과 날카로움을 부여했다. 타고난 관절 유연성, 특히 고관절의 유연함이 사이드 스로 폼과 맞아떨어져, 유려한 폼에서 위력적인 강속구를 만들어냈다. 이 폼은 요미우리의 오토모 다쿠미의 연속 사진을 연구한 결과였다.[3] 전성기에는 스기우라가 투구할 때 손목을 돌리는 "피싯" 소리가 백 네트 뒤나 벤치에서도 들렸다고 한다.[3][61]
3. 4. 구원 투수로의 변신과 은퇴
스기우라 다다시(杉浦일본어)는 시즌 중반, 의사로부터 "3이닝 이상은 던질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에 쓰루오카 감독은 스기우라를 구원 투수로 전담시키기로 결정했다.[18] 스기우라는 "제가 (마무리 투수로는) 퍼시픽 리그의 원조인가요. 구원 성공률은 높았어요. 앞선 투수가 내보낸 주자를 돌려보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세이브 제도가 있었다면 꽤 했을 텐데요"라고 회상했다.[11] 1977년에는 노무라 가쓰야가 이 기용법을 모방하여 에가와 유타카를 구원 투수로 전향시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스기우라는 1965년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결심했지만, 이듬해 1966년 난카이의 1군 투수 코치로 취임하면서 투수진 부족으로 인해 코치 겸임으로 현역에 복귀했다.[19] (코치 겸임은 1967년까지)[20] 복귀 후에도 구원 투수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부상은 완치되지 않았다. 스기우라는 여러 차례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으나 번번이 만류를 받았다.[21]
1969년 오프에 노무라가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도 은퇴를 요청했지만,[22] 노무라는 "베테랑과 젊은 선수, 선수와 코치의 파이프 역할을 해 벤치에 있어 줘, 팀으로서 필요한 일이니"라며 설득하여 현역을 속행했다.[23] 1970년 신인 사토 미치로가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으면서, 스기우라는 다시 은퇴 의사를 밝혔고, 노무라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24] 결국 구단은 1970년 12월 4일에 은퇴 신청을 승인했다.[21]
1971년 3월 25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자이언츠와의 오픈전에서 스기우라의 은퇴 경기가 열렸다. 5회 종료 후, 대학 동창이자 친구인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특별 대결이 펼쳐졌다. 나가시마는 스기우라의 2구를 받아쳐 안타를 만들었고, 노무라와 나가시마가 마운드의 스기우라에게 달려와 악수를 나누었다. 경기 후 스기우라는 "상대(나가시마)도 진지하게 쳐줘서……. 이상한 짓을 하는 것보다 저쪽이 기뻤다. 후회 없는 야구 생활이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25]
3. 5. 이나오 가즈히사와의 라이벌 관계
이나오 가즈히사와는 현역 시절 동기생이자 대투수로써 맞대결이 많았던 라이벌이었다. 스기우라는 이나오에게 마운드에서의 매너를 배우는 등 그의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이나오와 맞붙게 된 경기에서 이나오가 투구를 마친 1회말에 스기우라가 마운드에 올랐는데, 분명 이나오가 던졌으니 투구 시에 발을 디딘 부분이 패여 있어야 하는데도 마운드는 깨끗한 상태였다. 스기우라는 '처음이니까 이런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회, 3회가 지나도 마운드는 마찬가지로 깨끗한 상태였고 로진백도 바로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 스기우라는 '혹시 이나오가 정비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느꼈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대단한 투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기우라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노무라 가쓰야의 저서에 따르면, 언젠가 올스타전에서 벤치에 함께 있었을 때 노무라가 연구하고 있던 이나오의 버릇을 스기우라가 말해버렸다고 한다. 스기우라는 노무라가 열심히 연구하는 것을 이나오에게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발언한 것이었지만, 다음 시즌부터는 이나오가 버릇을 고치고 상대해 와서 노무라는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4. 은퇴 후
杉浦 忠|すぎう라 다다시일본어는 1990년에 프런트에 들어가 구단 이사로서 지역 사회 공헌에 힘썼으며, 1993년 9월 20일에 퇴단했다.[68] 호크스 퇴단 후, 1994년부터 큐슈 아사히 방송 해설자, 스포츠 닛폰 평론가를 맡았다. KBC에서는 "부처 스기우라, 귀신 카와무라(영문)"로 불리며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인기를 얻었다. 때로는 질책 섞인 격려의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당시의 캐치프레이즈는 "마이크 앞의 신사"였고, 후년에는 "구계의 신사"라고 소개되었다. 1999년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우승을 결정한 경기 라디오 방송에서는, 과거의 구절 "혼자가 되어 울고 싶다"를 비틀어, "혼자 나카스에서 술을 마시고 싶다"라고 중계했다. 다음 날 TV 중계에서는 부음성 해설을 담당하며 와다 야스오 아나운서와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본다"는 콘셉트로 방송했지만, 스기우라는 술을 마시면서 야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방송에서 "정말 괜찮군"이라고 말했다.[68]
1996년에는 출신지인 도요타시에서 처음으로 시 명예상을 받았다. 모교인 도요타니시고등학교(구 고모고등학교) 야구부 격려회에는 매년 다른 OB들과 함께 참석했지만, "프로 경험자가 가르치면 폐가 된다. 현역 지도자도 곤란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연습 참관 시에는 선수와 그물 너머로 이야기했다.[68] 1997년 7월 5일부터 8월 31일까지 도요타시 향토 자료관에서 스기우라의 추억의 물건을 모은 전시회 "너는 스기우라를 보았는가"가 열렸다.[68]
2001년부터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오사카 로망스의 헤드 코치를 맡았다. 요시다 요시오 감독 부재 시에는 3경기 대리 감독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11일, 오사카 로망스의 원정 숙소였던 삿포로시주오구의 호텔에서 급성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정토진종본원사파 사카이 별원에서 거행된 고별식에서는, 산문 앞에 모인 팬들이 내건 난카이 호크스 구단기와 구단가 "난카이 호크스의 노래" 합창으로 그를 보냈다.[68]
스기우라의 공적을 기려 마스터스 리그 최우수 투수에게 주어지는 "스기우라 상"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사후, 도요타니시고등학교 운동장 옆에는 난카이 유니폼 차림의 스기우라 흉상(높이 1.85 m)이 건립되었다.[68]
현역 시절 노무라와 관계가 좋아 스기우라, 노무라, 히로세 스미코 셋이서 지역과 원정지를 가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았으며, 술을 못하는 노무라도 기분 좋게 술자리에 함께 했다고 한다. 셋이서 통금 시간을 어기는 일도 다반사였고, 츠루오카에게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을 빗대어 "난카이의 세 악인"이라고 불렸다.[68][63] 스기우라는 노무라가 삼관왕을 획득한 1965년 12월에 간행한 첫 저서에 "제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노무라라는 인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저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머리가 좋은 남자입니다. 덕분에 제 피칭이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모릅니다"라는 코멘트를 썼다.[64]
그러나 이 우정은 스기우라의 은퇴 직후 노무라와 더블 불륜이 시작되면서 깨진다. 난카이에 남아 사치요와 격렬하게 충돌했던 히로세와 달리, 은퇴 후 난카이를 떠나 해설자와 긴테츠 코치를 맡았던 스기우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1977년 9월 노무라가 사치요의 잦은 현장 개입(사사로운 일과 공적인 일의 혼동)을 이유로 시즌 도중 감독에서 해임되자, 노무라는 같은 해 10월 『주간 문춘』에 발표한 "독점 수기"에서 자신이 해임된 원인은 츠루오카 파의 음모 때문이며, "츠루오카 두목의 최우수 문하생"인 스기우라가 감독이 되지 못해 여러 가지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1969년 오프 겸임 감독 취임 직후 스기우라가 은퇴하려 했던 것은 자신이 감독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앙심 때문이라며, 그때 스기우라에게 "너, 감독이 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65] 게다가 노무라는 1965년 11월 츠루오카가 난카이 퇴단 의사를 표명했을 때, 다른 간부 선수들과 함께 츠루오카 저택에 퇴단을 만류하러 갔을 때, 츠루오카로부터 "삼관왕?……웃기는 소리야", "홈런왕?……웃기는 소리야", "정말로 난카이에 공헌한 것은 스기우라뿐이야"라고 들었다고 주장했다.[65][4] 그러나 실제로는 츠루오카는 1960년대 초반 "자신의 후임은, 첫 번째 후보는 카게야마, 두 번째 후보는 노무라"라는 구상을 주변에 명시했었고,[66] 이 구상은 구단 내에서 널리 공유되었다. 구단 후원회도 1969년 오프에 "어쨌든 노무라는 감독을 맡아야 한다. 츠루오카 씨 다음은 카게야마 씨, 그 다음은 노무라라는 것이 난카이의 감독 노선이었지만, 카게야마 씨가 급사하고, 이이다 씨가 임시 대타로 들어왔을 뿐이다. 노무라는 맡아야 한다"라고 명언하며 노무라의 겸임 감독 취임을 지원했고,[67] 해임 후 노무라가 반복해서 주장한 스기우라의 감독 취임 공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1960년 가을, 우승 경쟁을 하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난카이에 "스기우라를 빌려 달라"는 제안이 왔다. 남은 경기가 10여 경기에 불과한 단기 임대였지만, 실현되었다면 일본인 메이저리거 1호가 될 뻔했다. 츠루오카 감독도 "일본 야구를 위해 좋은 일이다. 기회이니 해보라"며 찬성했고, 여권도 발급받아 미국으로 건너가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직전에 다이마이와 우승 경쟁 중이었고, 우승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내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구단에서 제동이 걸려 실현되지 못했다.
4. 1. 해설가와 코치 활동
杉浦 忠|すぎうら ただし일본어는 현역 은퇴 후, 매일방송(MBS) 해설자와 스포츠 닛폰 평론가(1971년~1973년)를 역임했다. 이후, 리쓰메이칸 대학 선배인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요청을 받아 킨테츠 버팔로스 1군 투수 코치(1974년~1977년)를 맡아 1975년에는 구단 사상 첫 리그 후기 우승에 기여했다.[68] 코치 재임 중에는 스즈키 케이지에게 힘을 빼는 투구술을 지도했고, 오타 코지에게는 무라야마 미노루의 폼을 따라 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며, 무라타 타츠미에게는 팔꿈치와 하반신 사용법을 가르쳤다.[68]1978년부터 다시 매일 방송 해설자를 맡았고, 1985년 9월 22일에는 난카이 호크스 감독으로 취임한다는 발표가 있었다.[68] 1986년 오프에는 1군 타격 코치로 나가이케 토쿠지를 영입했고,[68] 1988년에는 가와카츠 덴 구단주가 사망하는 등[68]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팀을 이끌었다. 난카이 호크스 마지막 홈 경기에서는 "'''호크스는 불멸입니다!'''", "감사합니다, (후쿠오카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명연설을 남겼다.[68]
1989년에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초대 감독이 되었으나, 오릭스로 이적한 몬다의 공백과 팀의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68] 하지만 여름에 토니 바나자드와 윌리 업쇼 등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과 기시카와 카츠야의 끈기 있는 타선에 힘입어 후반기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시즌을 4위로 마감하고 용퇴했다.[68]
호크스 퇴단 후에는 큐슈 아사히 방송(KBC) 해설자와 스포츠 닛폰 평론가를 맡았다.[68] KBC에서는 "부처 스기우라, 귀신 카와무라(영문)"로 불리며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인기를 얻었다.[68]
4. 2. 난카이·다이에 호크스 감독 시절
杉浦忠일본어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난카이·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맡았다.1985년 9월 22일, 난카이는 긴급 기자 회견을 열어 다음 해인 1986년부터 杉浦일본어가 난카이 감독을 맡는다고 발표했다. 16경기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당시 감독인 아나부키 요시오에게는 사전에 알리지 않았지만, 아나부키는 "당연하겠죠. 이런 건 빨리 발표하는 게 좋습니다. 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杉浦일본어 군이 꽃을 피워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68]
1986년, 杉浦일본어는 "가와가미 3루수 전향", "몬다·데이비드·굿윈의 60번 트리오"와 같은 구상을 내세웠지만, 가와가미는 타격 부진으로 5월 말에 2군으로 강등되어 2개월 만에 좌절되었고, 60번 트리오도 굿윈이 잦은 부상으로 부진에 빠졌다. 한편, 루키인 니시카와 요시아키가 10승을 거두고, 세이부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신인왕 경쟁을 펼쳐 퍼시픽 리그 특별상을 수상했다. 종반에는 이노우에 유지를 마무리로 기용하여 정착시켰다. 데이비드는 25홈런, 타율 0.285를 기록했고, 야마무라 요시노리가 115경기, 야마모토 카즈노리가 팀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1986년 오프, 1군 타격 코치로 나가이케 토쿠지에게 요청했고, 1987년에는 사사키 마코토, 유가미야 히로시의 1번·2번이 정착되었으며, 후지모토 슈지가 15승, 야마우치 카즈히로가 10승, 가토 에이지(요미우리를 자유 계약으로 풀려난 뒤 니시모토가 중개하여 이적해 옴)의 현역 생활 마지막을 장식하는 활약, 같은 해 9월 초까지 오랜만에 우승 경쟁을 펼쳐 구단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했다. 몬다와 가토가 통산 2000안타를 마크했고, 몬다가 126경기에 출전, 3년 만에 31홈런을 날리며 18년 만에 통산 3500루타, 1000득점, 2000경기의 기록을 세웠다.
1988년 4월 23일, "내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동안에는 호크스를 팔지 않겠다"고 말했던 가와카츠 덴 구단주가 사망했다. 5월에 13승 9패 1무로 최하위를 탈출하자, 닛폰햄이나 한큐나 롯데와 A클래스 경쟁을 펼쳤다. 구단 매각 이야기가 끊이지 않자, 새 구단주가 된 요시무라 시게오는 7월 말 올스타 브레이크에 수뇌진을 모아 "매각은 하지 않겠다"고 팀의 동요를 잠재웠다. 9월을 8승 11패로 마감하며 4위에서 5위로 내려갔다.
9월 10일, 원정지인 도쿄의 호텔에서 나가이케는 杉浦일본어에게 "나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겠다. 다음 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받았다. 나가이케는 놀랐고, 차기 감독은 수석 코치인 후지와라 미츠루로 여겨졌다. "순위도 올라갔습니다. 杉浦일본어 씨가 계속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지만, "杉浦일본어는 "아니, 나는 이제 안 돼"라며 퇴임 의사가 굳은 듯했다. 13일, 요시무라 구단주가 대형 슈퍼·다이에와 구단 매각 교섭을 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구단 양도의 조건으로 "호크스 명칭을 유지", "杉浦일본어 감독 유임"을 내걸었다.
몬다는 홈런 44개, 타점 125점으로 2관왕, 타율 .311, 장타율, 출루율, 사사구에서도 리그에서 압도적, MVP, 쇼리키 마츠타로 상도 받았다. 요시다 히로유키는 1985년에 이어 118경기에 마스크를 쓰고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달성했다. 팀 득점력은 리그 2위(578)였지만, 야마우치 카즈, 후지모토 슈, 야마우치 타카노리 등 주력 선수들이 부진, 팀 방어율 4.07로 리그 4위, 실책 113개로 리그 최저였다.
10월 12일 세이부전, 13일 한큐전과 홈인 오사카 구장에서 연속 끝내기 승리를 거두고, 15일 긴테츠전, 초만원의 3만 2000명의 관중을 삼킨 오사카 구장, 6대 4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난카이로서의 홈 경기 최종전 후 세레모니에서 杉浦일본어는 "나가시마 씨가 (현역에서) 은퇴했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불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만... '''호크스는 불멸입니다!'''" "감사합니다, (후쿠오카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스피치를 남겼다.
나가이케는 杉浦일본어로부터 "그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규슈에 가서 감독을 계속하게 되었다.", 게다가 새로운 코치진을 편성하기 위해 물러났다고 들었고, 나가이케는 "반론할 수도 없었다. 사흘 동안 감독 기분을 맛보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1989년, 杉浦일본어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초대 감독이 된다. 몬다가 오릭스로 이적하고, 대형 연패를 반복하며 최하위를 달렸지만, 여름에 반전했다. 토니 바나자드와 신 외국인 윌리 업쇼는 여름에 좋은 활약을 보였다. 특히 8월에는 바나자드가 타율 .349, 8홈런, 23타점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고, 업쇼도 타율 .326, 9홈런, 19타점으로 타선을 견인했다. 8월에는 14승 10패 1무로 첫 승리를 거두며, 이 두 사람의 넘치는 투지가 다른 선수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후반에 들어서자, 기시카와 카츠야가 당시 일본 타이기록인 시즌 3개의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는 등 타선이 끈기를 발휘했다. 10월 5일 세이부전(세이부)에서는 8점 차를 뒤집는 대역전승을 거두는 등(스코어는 13대 12), "'''영업 종료 직전의 다이에 야구'''"는 우승을 다투는 세이부·긴테츠·오릭스에게 위협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3개 구단과 대등한 승부를 펼쳐 순위를 4위까지 올리고, 우승한 긴테츠에게는 13승 11패 2무로 승리, 8월 이후에는 28승 19패 3무승부로 좋은 형태로 시즌을 종료하고, 시즌 종료 후에 용퇴했다.
투수진에서는 요시다 토요히코가 10승을 거두며 로테이션에 합류했고, 가토 신이치가 첫 두 자릿수 승리인 12승을 거두었으며, 이노우에가 27SP로 팀 최초의 타이틀(최우수 구원 투수)을 차지했다. 2년차의 무라타 카츠키, 신인 마츠모토 타쿠야가 두각을 나타냈고, 중간 계투로 야노 미노루가 50경기 등판했다. 야수에서는 사사키, 후지모토 히로시, 기시카와가 두각을 나타냈고, 바나자드와 업쇼 두 외국인 선수로 67홈런을 쳐 홈런 수는 166개로 리그 2위였다.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홈런 | 타율 | 방어율 | 연령 |
---|---|---|---|---|---|---|---|---|---|---|---|---|
1986년 | 난카이 다이에 | 6위 | 130 | 49 | 73 | 8 | .402 | 21.5 | 136 | .251 | 4.46 | 51세 |
1987년 | 4위 | 130 | 57 | 63 | 10 | .475 | 16.0 | 132 | .261 | 3.86 | 52세 | |
1988년 | 5위 | 130 | 58 | 71 | 1 | .450 | 17.5 | 162 | .267 | 4.07 | 53세 | |
1989년 | 4위 | 130 | 59 | 64 | 7 | .480 | 11.0 | 166 | .257 | 4.74 | 54세 | |
통산: 4년 | 520 | 223 | 271 | 26 | .451 | B 클래스 4회 |
- 난카이(난카이 호크스)는 1989년에 다이에(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변경
4. 3. '마이크 앞의 신사'
杉浦 忠|すぎうら ただし일본어는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인기를 얻었으며, "마이크 앞의 신사", "구계의 신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큐슈 아사히 방송(KBC) 해설 시절에는 "부처 스기우라, 귀신 카와무라(영문)"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68] 199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우승을 결정한 경기 라디오 중계에서,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인 "혼자가 되어 울고 싶다"를 비틀어 "혼자 나카스에서 술을 마시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68] 다음 날 TV 중계에서는 와다 야스오 아나운서와 함께 부음성 해설을 담당하며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본다"는 콘셉트로 방송을 진행했는데, 술을 마시면서 야구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정말 괜찮군"이라고 말했다.[68]4. 4. 갑작스러운 죽음과 추모
스기우라는 2001년 11월 11일,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였다.5. 평가와 영향
스기우라 다다시는 땅에서 떠오르는 듯한 직구와 큰 횡 변화구를 주 무기로 삼았다. 특히 변화구는 변화 폭이 커서 좌타자가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하고 헛스윙을 했지만 몸에 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3] 노무라 가쓰야는 자신의 저서에서 에노모토 기하치가 스기우라의 바깥쪽에서 예리하게 꺾이는 변화구에 헛스윙했는데, 공이 배에 꽂히듯이 맞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48]
스기우라의 투구 폼은 '손목을 세운 언더스로'라고 불리는 독특한 손목 사용법이 특징이었다. 오토모 다쿠미의 연속 사진을 보고 연구한 결과, 이러한 독특한 투구폼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3] 전성기 시절 스기우라가 공을 던질 때면, 백 네트 뒤나 벤치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손목을 돌리는 "피싯" 소리가 들렸다고 전해진다.[3][61]
노무라 가쓰야는 스기우라의 하체 근력과 근육의 질이 윌리 메이스와 흡사하다고 평가했다.[51] 히로세 스구오 역시 스기우라의 유연한 몸과 빠른 발을 언급하며, 경주에서 스기우라에게 진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49]
하지만, 스기우라는 후년에 싱커를 익히면서 오히려 장점을 잃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미나가와 무쓰오의 싱커를 배우려다 자신의 장점인 직구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50] 노무라 가쓰야는 스기우라가 싱커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승수를 올렸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51]
노무라 가쓰야는 상대했던 선수 중 가장 대단했던 선수로 이나오 카즈히사를 꼽았지만, 자신이 받아본 투수 중에서는 스기우라가 최고였다고 평가했다. 스기우라의 커브는 우타자 등 뒤에서 휘어져 들어오는 궤적을 그렸으며, 직구는 떠올랐다고 회상했다.[52]
타쿠와 모토지는 스기우라의 투구를 보고 '위에는 더 높은 곳이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고 말했다. 또한 스기우라가 공 하나도 낭비하지 않는 피칭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야마다 히사시와는 다른 유형의 훌륭한 언더스로 투수였다고 평가했다.[52]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 스기우라에게 압도당했던 나가시마 시게오는 스기우라의 공이 우타자 등 뒤에서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 전혀 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52]
하리모토 이사오는 퍼시픽 리그 최고의 투수 3명으로 이나오, 스기우라, 도바시 마사유키를 꼽았다. 특히 스기우라의 커브는 사이온지 아키오가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고 평가했다.[55] 언더스로 투수 중에서는 스기우라, 아키야마 노보루, 야마다 히사시 순으로 공의 위력이 있었다고 말했다.[56]
야마다 히사시는 스기우라의 커브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어졌다며, 커브 던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57]
1958년 미일 친선 야구에서 스기우라에게 삼진을 당한 스탠 뮤지얼은 귀국할 때 스기우라를 가장 인상 깊었던 투수로 언급했다.[58]
마쓰누마 히로히사, 야마다 히사시, 와타나베 슌스케는 역대 언더스로 삼걸을 꼽는 질문에 모두 스기우라의 이름을 올렸다.[59]
스기우라 본인은 타자로서 대결해 보고 싶은 투수로 자기 자신을 꼽았는데, 자신이 던지는 공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스기우라는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이나오 카즈히사에게서 마운드 매너 등 많은 것을 배우려 노력했다. 이나오가 투구 후 마운드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61]
1958년 미일 친선 야구에서 나카니시 후토시, 이나오와 술자리를 가진 스기우라는 내년에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60]
노무라 가쓰야는 스기우라가 자신의 이나오 연구를 이나오에게 말해버려 이나오가 버릇을 고치는 바람에 다시 연구해야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70]
스기우라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나오와 스기우라의 투구 대결 전적은 24승 24패로 동률이다.[68]
스기우라는 센트럴 리그의 화려한 투수들에게 강한 대항심을 가졌으며, 그들의 행동과 반대로 조용하고 신사적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61]
스즈키 다카오 (야구)는 쓰루오카 가즈토와 스기우라의 관계를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유대 관계로 표현했다.[52]
스기우라 부인은 스기우라가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매일 던졌다고 회고했다.[52]
히로세 스미는 쓰루오카 가즈토가 스기우라에게 직접 칭찬을 한 적이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는 것이 있었다고 회고했다.[62]
5. 1. 긍정적 평가
스기우라 다다시는 프로 야구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59년에는 38승 4패, 평균 자책점 1.40, 탈삼진 336개, WHIP 0.75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1] 통산 성적은 187승 106패, 평균 자책점 2.39, 탈삼진 1756개, WHIP 0.99이다.[1]연도 | 소속팀 | 경기 수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배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고의4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
1958년 | 난카이 | 53 | 14 | 1 | 3 | 27 | 12 | -- | -- | .692 | 1187 | 299.0 | 235 | 11 | 72 | 4 | 13 | 215 | 4 | 0 | 91 | 68 | 2.05 | 1.03 |
1959년 | 69 | 19 | 9 | 9 | 38 | 4 | -- | -- | .905 | 1377 | 371.1 | 245 | 17 | 35 | 2 | 11 | 336 | 2 | 0 | 67 | 58 | 1.40 | 0.75 | |
1960년 | 57 | 22 | 4 | 8 | 31 | 11 | -- | -- | .738 | 1284 | 332.2 | 266 | 28 | 44 | 5 | 5 | 317 | 1 | 0 | 85 | 76 | 2.05 | 0.93 | |
1961년 | 53 | 12 | 1 | 1 | 20 | 9 | -- | -- | .690 | 946 | 241.2 | 202 | 24 | 31 | 3 | 10 | 190 | 1 | 0 | 85 | 75 | 2.79 | 0.96 | |
1962년 | 43 | 6 | 1 | 1 | 14 | 15 | -- | -- | .483 | 705 | 172.2 | 165 | 12 | 36 | 4 | 5 | 96 | 1 | 0 | 68 | 59 | 3.07 | 1.16 | |
1963년 | 51 | 9 | 1 | 3 | 14 | 16 | -- | -- | .467 | 990 | 252.2 | 217 | 30 | 46 | 5 | 1 | 156 | 1 | 0 | 86 | 74 | 2.63 | 1.04 | |
1964년 | 56 | 9 | 1 | 3 | 20 | 15 | -- | -- | .571 | 1100 | 270.2 | 253 | 28 | 52 | 4 | 9 | 162 | 1 | 0 | 103 | 91 | 3.02 | 1.13 | |
1965년 | 36 | 3 | 0 | 0 | 8 | 1 | -- | -- | .889 | 429 | 111.1 | 85 | 10 | 16 | 0 | 2 | 82 | 0 | 0 | 27 | 27 | 2.19 | 0.91 | |
1966년 | 27 | 0 | 0 | 0 | 2 | 4 | -- | -- | .333 | 191 | 51.0 | 42 | 6 | 3 | 0 | 0 | 39 | 0 | 0 | 16 | 14 | 2.47 | 0.88 | |
1967년 | 45 | 0 | 0 | 0 | 5 | 5 | -- | -- | .500 | 384 | 98.1 | 82 | 9 | 16 | 2 | 2 | 68 | 0 | 0 | 29 | 26 | 2.39 | 1.00 | |
1968년 | 41 | 0 | 0 | 0 | 5 | 6 | -- | -- | .455 | 457 | 111.0 | 100 | 8 | 32 | 6 | 4 | 53 | 1 | 0 | 39 | 33 | 2.68 | 1.19 | |
1969년 | 30 | 1 | 0 | 0 | 2 | 7 | -- | -- | .222 | 268 | 65.1 | 68 | 8 | 16 | 1 | 3 | 33 | 0 | 0 | 33 | 30 | 4.15 | 1.29 | |
1970년 | 16 | 0 | 0 | 0 | 1 | 1 | -- | -- | .500 | 141 | 35.2 | 28 | 4 | 10 | 1 | 2 | 9 | 0 | 0 | 13 | 11 | 2.75 | 1.07 | |
통산: 13년 | 577 | 95 | 18 | 28 | 187 | 106 | -- | -- | .638 | 9459 | 2413.1 | 1988 | 195 | 409 | 37 | 67 | 1756 | 12 | 0 | 742 | 642 | 2.39 | 0.99 |
5. 2. 부정적 평가
스기우라 다다시는 감독으로서 4년간 통산 223승 271패 26무, 승률 .451을 기록했으며, B클래스(4위 이하)를 4회 기록했다.[1]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홈런 | 타율 | 방어율 |
---|---|---|---|---|---|---|---|---|---|---|---|
1986년 | 난카이 호크스[1] | 6위 | 130 | 49 | 73 | 8 | .402 | 21.5 | 136 | .251 | 4.46 |
1987년 | 4위 | 130 | 57 | 63 | 10 | .475 | 16.0 | 132 | .261 | 3.86 | |
1988년 | 5위 | 130 | 58 | 71 | 1 | .450 | 17.5 | 162 | .267 | 4.07 | |
1989년 | 4위 | 130 | 59 | 64 | 7 | .480 | 11.0 | 166 | .257 | 4.74 |
6. 상세 정보
스기우라 다다시는 릿쿄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 신인임에도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서 도에이 플라이어스를 상대로 승리 투수가 되었고,[75] 그 해 27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했다.[74]
1959년에는 38승 4패(승률 9할 5리)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4연투 4연승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며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76]
이후에도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연투로 인한 오른팔 혈행장애와 싱커 구종 추가로 인해 성적이 점차 하락했다.[78] 선수 생활 말년에는 주로 구원 투수로 활약했으며, 1966년과 1967년에는 투수 코치를 겸임하기도 했다.[79] 197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1971년 3월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가 은퇴 경기로 진행되었는데, 친구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중전 안타를 쳐내며 스기우라의 앞날을 축복했다.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탈삼진 | 평균자책점 | WHIP |
---|---|---|---|---|---|---|---|---|---|---|---|---|
1958년 | 난카이 | 53 | 27 | 12 | - | .692 | 299.0 | 235 | 11 | 215 | 2.05 | 1.03 |
1959년 | 69 | 38 | 4 | - | .905 | 371.1 | 245 | 17 | 336 | 1.40 | 0.75 | |
1960년 | 57 | 31 | 11 | - | .738 | 332.2 | 266 | 28 | 317 | 2.05 | 0.93 | |
1961년 | 53 | 20 | 9 | - | .690 | 241.2 | 202 | 24 | 190 | 2.79 | 0.96 | |
1962년 | 43 | 14 | 15 | - | .483 | 172.2 | 165 | 12 | 96 | 3.07 | 1.16 | |
1963년 | 51 | 14 | 16 | - | .467 | 252.2 | 217 | 30 | 156 | 2.63 | 1.04 | |
1964년 | 56 | 20 | 15 | - | .571 | 270.2 | 253 | 28 | 162 | 3.02 | 1.13 | |
1965년 | 36 | 8 | 1 | - | .889 | 111.1 | 85 | 10 | 82 | 2.19 | 0.91 | |
1966년 | 27 | 2 | 4 | - | .333 | 51.0 | 42 | 6 | 39 | 2.47 | 0.88 | |
1967년 | 45 | 5 | 5 | - | .500 | 98.1 | 82 | 9 | 68 | 2.39 | 1.00 | |
1968년 | 41 | 5 | 6 | - | .455 | 111.0 | 100 | 8 | 53 | 2.68 | 1.19 | |
1969년 | 30 | 2 | 7 | - | .222 | 65.1 | 68 | 8 | 33 | 4.15 | 1.29 | |
1970년 | 16 | 1 | 1 | - | .500 | 35.2 | 28 | 4 | 9 | 2.75 | 1.07 | |
통산: 13년 | 577 | 187 | 106 | - | .638 | 2413.1 | 1988 | 195 | 1756 | 2.39 | 0.99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수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최고 훈장 선수(MVP): 1회 (1959년)
- 신인왕 (1958년)
- 베스트 나인: 1회 (1959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95년)
- 최우수 투수: 1회 (1959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59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 (1959년)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을 맡았다.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홈런 | 타율 | 방어율 | 연령 |
---|---|---|---|---|---|---|---|---|---|---|---|---|
1986년 | 난카이 호크스 | 6위 | 130 | 49 | 73 | 8 | .402 | 21.5 | 136 | .251 | 4.46 | 51세 |
1987년 | 4위 | 130 | 57 | 63 | 10 | .475 | 16.0 | 132 | .261 | 3.86 | 52세 | |
1988년 | 5위 | 130 | 58 | 71 | 1 | .450 | 17.5 | 162 | .267 | 4.07 | 53세 | |
1989년 | 4위 | 130 | 59 | 64 | 7 | .480 | 11.0 | 166 | .257 | 4.74 | 54세 | |
통산: 4년 | 520 | 223 | 271 | 26 | .451 | B클래스 4회 |
스기우라는 난카이 입단 당시 등번호 14번을 제안받았으나, 대학 선발팀으로 필리핀 원정에서 착용했던 21번으로 변경을 요청했다. 이는 2스트라이크 1볼에서 승부하는 것이 투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1]
6. 1. 선수 경력
릿쿄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에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난카이에서 릿쿄 대학 선배였던 오사와 마사요시(오사와 게이지)에게서 상당한 액수의 영양비를 나가시마와 함께 받았으나, 난카이 감독 쓰루오카(야마모토) 가즈토에게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십니까?"라며 강하게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나가시마는 요미우리에 입단했지만, 스기우라는 의리를 지키며 난카이에 입단했다.[75]신인이면서도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아 도에이 플라이어스를 상대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75] 손 아래에서 떠오르는 직구와 옆으로 크게 휘어지는 커브로 프로 타자들을 상대하며[74] 입단 첫 해에 27승을 거둬 신인왕을 차지했다. 쓰루오카 감독은 "이제 겨우 니시테쓰를 두드릴 수 있게 됐다"라며 칭찬했다.[74]
1959년에는 '''38승 4패(승률 9할 5리)'''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난카이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24선발승으로 1955년 오토모 다쿠미(26선발승)에 이어 역대 잠수함 최다 선발승 2위에 랭크되었지만 1968년 같은 팀 미나가와 무쓰오가 26선발승으로 타이 기록을 세움),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다(투수 부문 5관왕). 같은 해 기록한 54와 2/3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은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74]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1차전부터 4차전까지 모두 등판해 4연투, 4연승으로 활약하며 난카이의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이때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스기우라는 "혼자가 되면 기쁨이 북받쳐 오르겠죠"라고 말하려던 것을 "혼자가 되어 울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59년 24선발승은 역대 퍼시픽리그 정규시즌 MVP 최다 선발승 기록이었지만, 2013년 다나카 마사히로와 타이 기록이 되었다.[76]
동료였던 다쿠와 모토지는 스기우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스기우라의 투구를 보고 '위에는 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투구 철학에서도 공 하나를 낭비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스기우라가 고의사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볼넷을 싫어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투구 수로 아웃을 잡을지를 생각했다. 한큐의 야마다 히사시도 좋은 언더핸드였지만 유형이 달랐다. 스기우라는 아래에서 던지지만 손목이 위에서 던지는 궤도를 그린다. 니시테쓰와의 대결에서는 스기우라와 이나오 가즈히사의 에이스 대결이 펼쳐졌는데, 내가 불펜에 가려고 하자 두목(쓰루오카)이 "넌 벤치에 가만히 있어라"라며 만류했다. 구원이 필요없다는 뜻으로, 그만큼 신뢰했다는 것이다. 38승을 거둔 2년 차에는 언제 질까 생각했다. 저런 투수는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77]
이후에도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연투로 오른팔에 혈행장애가 생겼고,[78] 노무라 가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익혔던 싱커가 오히려 특색을 없애며 성적이 점차 하락했다. 긴 이닝을 소화하기 어려워진 선수 생활 말년에는 주로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 1966년에는 투수 코치를 겸임했고,[79] 1967년까지 역임했다.[80]
1970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듬해 1971년 3월 오사카 구장에서 요미우리와의 시범 경기가 은퇴 경기로 진행되어 친구인 나가시마의 타석에서 등판했다. 나가시마는 기자들의 질문에 "마음껏 휘둘러 삼진당하겠다"라고 답했지만, 결과는 은퇴 경기의 '약속'이었던 삼진이 아니라 충격적인 중전 안타였다. 스기우라는 "나가시마가 진심으로 상대해 준 것이 매우 기뻤고, 자부심을 느낀다. 잠자리가 멈출 듯한 느린 공이었다면, 그는 헛스윙 삼진을 당하지 않았을까"라고 회고했다.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탈삼진 | 평균자책점 | WHIP |
---|---|---|---|---|---|---|---|---|---|---|---|---|
1958년 | 난카이 | 53 | 27 | 12 | - | .692 | 299.0 | 235 | 11 | 215 | 2.05 | 1.03 |
1959년 | 69 | 38 | 4 | - | .905 | 371.1 | 245 | 17 | 336 | 1.40 | 0.75 | |
1960년 | 57 | 31 | 11 | - | .738 | 332.2 | 266 | 28 | 317 | 2.05 | 0.93 | |
1961년 | 53 | 20 | 9 | - | .690 | 241.2 | 202 | 24 | 190 | 2.79 | 0.96 | |
1962년 | 43 | 14 | 15 | - | .483 | 172.2 | 165 | 12 | 96 | 3.07 | 1.16 | |
1963년 | 51 | 14 | 16 | - | .467 | 252.2 | 217 | 30 | 156 | 2.63 | 1.04 | |
1964년 | 56 | 20 | 15 | - | .571 | 270.2 | 253 | 28 | 162 | 3.02 | 1.13 | |
1965년 | 36 | 8 | 1 | - | .889 | 111.1 | 85 | 10 | 82 | 2.19 | 0.91 | |
1966년 | 27 | 2 | 4 | - | .333 | 51.0 | 42 | 6 | 39 | 2.47 | 0.88 | |
1967년 | 45 | 5 | 5 | - | .500 | 98.1 | 82 | 9 | 68 | 2.39 | 1.00 | |
1968년 | 41 | 5 | 6 | - | .455 | 111.0 | 100 | 8 | 53 | 2.68 | 1.19 | |
1969년 | 30 | 2 | 7 | - | .222 | 65.1 | 68 | 8 | 33 | 4.15 | 1.29 | |
1970년 | 16 | 1 | 1 | - | .500 | 35.2 | 28 | 4 | 9 | 2.75 | 1.07 | |
통산: 13년 | 577 | 187 | 106 | - | .638 | 2413.1 | 1988 | 195 | 1756 | 2.39 | 0.99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수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최고 훈장 선수(MVP): 1회 (1959년)
- 신인왕 (1958년)
- 베스트 나인: 1회 (1959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95년)
- 최우수 투수: 1회 (1959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59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 (1959년)
6. 2. 지도자 경력
杉浦忠일본어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을 맡았다.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홈런 | 타율 | 방어율 | 연령 |
---|---|---|---|---|---|---|---|---|---|---|---|---|
1986년 | 난카이 호크스 | 6위 | 130 | 49 | 73 | 8 | .402 | 21.5 | 136 | .251 | 4.46 | 51세 |
1987년 | 4위 | 130 | 57 | 63 | 10 | .475 | 16.0 | 132 | .261 | 3.86 | 52세 | |
1988년 | 5위 | 130 | 58 | 71 | 1 | .450 | 17.5 | 162 | .267 | 4.07 | 53세 | |
1989년 | 4위 | 130 | 59 | 64 | 7 | .480 | 11.0 | 166 | .257 | 4.74 | 54세 | |
통산: 4년 | 520 | 223 | 271 | 26 | .451 | B클래스 4회 |
6. 3. 수상·타이틀 경력
- 신인왕 (1958년)
- MVP (1959년)
- 일본 시리즈 MVP (1959년)
- 최다승: 1회 (1959년)
- 최우수 방어율: 1회 (1959년)
- 최다 탈삼진: 2회 (1959년, 1960년)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표창
- 최고 승률: 1회 (1959년)
6. 4. 개인 기록
기록 | 내용 | 달성일(장소) | 비고 |
---|---|---|---|
첫 등판, 첫 선발, 첫 승리 | 1958년 4월 5일, 도에이 플라이어스 1차전 (고마자와 야구장) | 7이닝 2실점 | |
첫 탈삼진 | 1958년 4월 5일, 도에이 플라이어스 1차전 (고마자와 야구장), 1회말에 도쿠시마 쇼이치 | ||
첫 완투 승리 | 1958년 4월 20일,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 2차전 (가와사키 구장) | 9이닝 2실점 | |
첫 완봉 승리 | 1958년 9월 24일, 도에이 플라이어즈 22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 ||
1000 투구 이닝 | 1959년 10월 2일, 한큐 브레이브스 28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 역대 89번째 | |
100승 | 1961년 5월 6일, 니시테츠 라이온즈 5차전 (헤이와다이 야구장) | 역대 32번째 | |
1000 탈삼진 | 1961년 7월 29일, 니시테츠 라이온즈 17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9회초에 키도 노리후미 | 역대 23번째 | |
1500 투구 이닝 | 1963년 6월 27일, 도에이 플라이어스 1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 역대 48번째 | |
150승 | 1964년 5월 26일, 도쿄 오리온스 14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 역대 17번째 | |
1500 탈삼진 | 1965년 5월 2일, 한큐 브레이브스 5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말에 대릴 스펜서 | 역대 13번째 | |
2000 투구 이닝 | 1965년 5월 19일, 도에이 플라이어스 7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 역대 28번째 | |
500경기 등판 | 1968년 5월 24일, 한큐 브레이브스 9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 6회말 2사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3과 1/3이닝 무실점, 역대 22번째 | |
투수 트리플 크라운 | 1회 (1959년) | 역대 9번째 | |
투수 4관왕 | 1회 (1959년) | 역대 6번째 | |
투수 5관왕 | 1회 (1959년) | 역대 5번째, 퍼시픽 리그 최초, 20세기 퍼시픽 리그 유일 | |
시즌 승리 마진 | 34 (1959년) | 역대 최다 | |
연속 이닝 무실점 | 54.2 (1959년 9월 15일 - 10월 20일) | ||
신인부터 3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 | (1958년 - 1960년) | 2리그제 이후 유일, 노리모토 타카히로가 4년 연속 (2013년 - 2016년)으로 갱신 | |
초회 선두 타자부터 3자 연속 피홈런 | 1964년 7월 17일, 한큐 브레이브스전 (오사카 구장), 1회초에 슈쥬 키시히로, 고노 아키테루, 대릴 스펜서 | 역사상 최초 | |
일본 시리즈 4연투 4연승 | 1959년 | 이나오 가즈히사 이후 역대 2번째, 무패는 유일 | |
일본 시리즈 4승 | 1959년 | 이나오 가즈히사 이후 역대 2번째 | |
올스타전 출장 | 6회 (1958년 - 1961년, 1964년, 1965년) |
6. 5. 등번호
스기우라 다다시는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할 당시 등번호 14번을 제안받았으나, 대학 선발팀으로 필리핀 원정에서 착용했던 21번으로 변경을 요청했다. 이는 2스트라이크 1볼에서 승부하는 것이 투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1] 은퇴 경기 당시 신문에는 "영구 결번이 된다"고 보도되었지만,[25] 구단이 정식으로 결정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971년에는 21번 착용자가 없었지만, 1972년 드래프트 1순위 지명자인 노자키 쓰네오가 사용하게 되면서 "결번" 처리는 1시즌 만에 종료되었다.등번호 |
---|
21 (1958년 - 1970년) |
70 (1974년 - 1977년) |
71 (1986년 - 1988년) |
81 (1989년) |
참조
[1]
논문
新収蔵資料紹介 昭和の大投手 杉浦忠 関係資料
https://web.archive.[...]
豊田市郷土資料館
2024-09-02
[2]
서적
プロ野球データブック'84
講談社文庫
1984
[3]
서적
南海ホークス栄光の歴史 1938-198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2
[4]
서적
一流の条件 プロ野球 野村克也の目
朝日新聞社
1986
[5]
뉴스
初の豊田市栄誉賞、杉浦氏に
朝日新聞名古屋本社
1996-02-16
[6]
간행물
Sports Graphic Number PLUS
文芸春秋社
1999-08
[7]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2003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8]
뉴스
【愛知県】豊田市出身、元南海エース 杉浦さんに市栄誉賞
中日新聞社
1996-02-16
[9]
서적
野球殿堂2012 The Baseball Hall of Fame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2
[10]
뉴스
【愛知県】元南海エース・杉浦忠氏死去 「郷土のヒーローだったのに」 出身地・豊田 悲しみの声広がる
中日新聞社
2001-11-13
[11]
서적
日本プロ野球偉人伝5 1959-1964 「長嶋時代」の74人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3
[12]
뉴스
長嶋さんの中日入りを思いとどまらせた男 立教大のミスターと杉浦忠さんを諭した球団代表がいた【コラム】
https://www.chunichi[...]
中日新聞社
2020-11-21
[13]
서적
鶴岡一人の栄光と血涙のプロ野球史
恒文社
1977
[14]
웹사이트
明暗クッキリ 長嶋の同級生杉浦忠 大量援護でプロ初勝利
http://www.sponichi.[...]
2011-08-12
[15]
웹사이트
ホークスの歩み(1959年)
https://www.softbank[...]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
2020-04-02
[16]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 昭和11年→平成4年
講談社
1993
[17]
웹사이트
杉浦忠、入団4年目で100勝も忍び寄っていた病魔
http://www.sponichi.[...]
2011-08-12
[1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70-12-08
[19]
뉴스
1966-04-06
[20]
서적
HAWKS the 70th - ホークス栄光の軌跡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8
[21]
뉴스
1970-12-05
[22]
뉴스
1969-11-08
[2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70-12-08
[2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70-12-08
[25]
뉴스
1971-03-26
[26]
웹사이트
1995年 名球会目指してきたわけじゃない 落合博満、資格獲得も入会辞退
http://www.sponichi.[...]
[27]
서적
伝説の剛速球投手 君は山口高志を見たか
講談社
2014
[28]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11-11
[29]
웹사이트
元近鉄村田辰美氏「年中夢求」で1人でもプロ選手を
https://www.nikkansp[...]
[30]
서적
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1 [1985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9
[31]
서적
HAWKS the 70th - ホークス栄光の軌跡
[32]
서적
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1 [1986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9
[33]
서적
南海ホークス栄光の歴史 1938-198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2
[34]
서적
プロ野球レジェンドが語るあの日、あのとき
産経新聞出版
2015
[35]
서적
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1 [1987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
[36]
서적
HAWKS the 70th - ホークス栄光の軌跡
[37]
뉴스
長池徳士の我が道㉗、身売りで消えた「南海監督」
スポーツニッポン
2023-07-28
[38]
서적
HAWKS the 70th - ホークス栄光の軌跡
[39]
서적
HAWKS the 70th - ホークス栄光の軌跡
[40]
서적
ホークス九州20年史―1989-2008 飛翔!若鷹軍団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8
[41]
서적
HAWKS the 70th - ホークス栄光の軌跡
[42]
서적
ホークス九州20年史―1989-2008 飛翔!若鷹軍団
[43]
뉴스
勇者の物語 杉浦忠の役目 「ホークスの顔」ダイエー本拠地に奔走 虎番疾風録番外編344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21-11-04
[44]
서적
HAWKS the 70th - ホークス栄光の軌跡
[45]
뉴스
【愛知県】郷土の大投手“勇姿”再び 思い出の品集めて展示会 5日から 豊田 豊田市出身・元南海の杉浦氏 ユニホームやグラブ…200点
中日新聞社
1997-06-28
[46]
뉴스
元南海エース 4連投日本一 杉浦忠氏死去
中日新聞社
2001-11-12
[47]
뉴스
故杉浦忠さん 球児見守る姿“現役” グラウンド脇に胸像 母校・豊田西高
中日新聞社
2002-11-17
[48]
서적
楽天はなぜ強くなれたのか 巨人の「天才野球」をしのいだ力
PHP新書
2014
[49]
서적
南海ホークス ナンバ栄光と哀しみの故郷
[50]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野村克也の野球論 本物の野球はどこへ行った「温故知新」
http://column.sp.bas[...]
2015-05-31
[51]
서적
エースの品格 一流と二流の違いとは
小学館
2008
[52]
서적
感涙!ナニワ野球伝説
朝日新書
2011
[53]
서적
名選手にドラマあり 脳裏に焼き付くあのシーン
小学館新書
2014
[54]
서적
私が見た最高の選手、最低の選手
東邦出版
2013
[55]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レジェンドたちに聞け 第1回 張本勲
2014-03-07
[56]
웹사이트
速球派のアンダースロー投手
https://blog.goo.ne.[...]
2015-05-31
[57]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レジェンドに聞け 第14回 山田久志
2014-06-05
[58]
서적
Sports Graphic NUMBER PLUS August 1999
文芸春秋社
[59]
블로그
サブマリン投手 ( 野球 ) - 人生いろいろ
https://web.archive.[...]
[60]
서적
西鉄ライオンズ 獅子たちの「闘争」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
[61]
서적
豪球列伝
文春文庫ビジュアル版
1986
[62]
서적
南海ホークス ナンバ栄光と哀しみの故郷
[63]
서적
南海ホークス ナンバ栄光と哀しみの故郷
[64]
서적
運鈍根
[65]
잡지
週刊文春
1977-10-13
[66]
잡지
週刊ベースボール
1965-12-08
[67]
잡지
週刊ベースボール
1969-11-10
[68]
서적
僕の愛した野球
海鳥社
1995
[69]
서적
栄光の背番号3 長島茂雄
報知新聞社
1974
[70]
서적
ホークス75年史 1938-2013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3
[71]
뉴스
読売新聞
読売新聞
2010-12-25
[72]
뉴스
元プロ野球の杉浦忠さんに、新設の「豊田市栄誉賞」 /愛知
毎日新聞
1996-02-16
[73]
문서
연간 34승 이상을 기록한 다른 6명의 투수는 모두 그 해에 6패 이상을 기록했기 때문에
[74]
서적
야구 전당 2012 The Baseball Hall of Fame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2
[75]
웹사이트
明暗クッキリ 長嶋の同級生杉浦忠 大量援護でプロ初勝利
http://www.sponichi.[...]
2011-06-25
[76]
뉴스인용
<日야구> 24연승 다나카·60홈런 발렌틴 MVP 영예
https://sports.news.[...]
연합뉴스
2013-11-27
[77]
서적
감격의 눈물! 나니와 야구 전설
아사히 신문 출판
2011
[78]
웹사이트
杉浦忠、入団4年目で100勝も忍び寄っていた病魔
http://www.sponichi.[...]
2011-06-26
[79]
서적
HAWKS the 70th - 호크스 영광의 궤적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8
[80]
서적
HAWKS the 70th - 호크스 영광의 궤적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8
[81]
뉴스
요미우리 신문
요미우리 신문
2010-12-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